코리언 vs 유러피언
2001년 3월 3일 토요일 날씨 무지무지 쌀쌀함.
오후에 주희랑 마리아랑 세인즈버리(Sainsbury's)에 갔다. 참 먹고 살려니 언제나 시내 나가는 날은 먹을거 사는 날이다. 거의 아침 점심은 씨리얼이나 과일 먹고 저녁에만 밥이든 고기든 좀 제대로 먹는데도 먹을거로 나가는 돈이 꽤 많다. 인류가 먹지 않고도 살수가 있다면 진짜 세상에 돈 쓸 일 별로 없을거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는게 맞는 말이다. 암튼 가서 야채, 감자, 우유, 과일, 쌀 등등을 사서 책가방에 허리가 휘어지도록 (별거 없는데 무겁기만 하다..휴) 꽉꽉 채워왔는데 집에 도착하니까 나름대로 뿌듯했다. 동생이랑 살아보니 내가 살림살이 및 요리엔 얼마나 젬병인지 팍팍 느껴진다. 뭐 원래 알고 있었지만...^^ 주흴 빨리 시집을 보내야 한다. 저런 애를 직장 생활 시킨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인적자원 낭비다..헛헛
일단 오븐 칩스를 구워서 늦은 점심을 먹고나니 그간의 피로가 밀려왔다. 3-4일을 연속으로 거의 밤새다 시피해서 그런지 지금 자면 낼 아침에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밀려왔지만 그냥 잠이 들었다. 정말 멋진 꿈을 꾸었다. 아주 멋진 남자랑 앞니가 쑥 빠지도록 키스를 하는 그런 꿈을 열심히 꾸고 있는 중에 전화가 오는 것이었다. 꿈 속의 소리려니 했는데..알고보니 진짜 전화벨 소리였다. 흑흑..눈물을 머금고 받으니 노라였다. 오늘 밤 유니온에서 Greek night가 있는데 같이 가잔다. 사실 지난주 부터 노라가 계속 그동안 우리 넘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한 번 나이트를 뛰어줘야 된다고 강조했는데 갈까말까 망설여졌다. 마케팅 공부할 것도 있고 오늘 가면 낼까지 피곤할 것 같기도 하고...암튼 춤을 추고 나면 그동안 나를 괴롭혀 오고 있는 변비 문제가 좀 해결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한 번 나가서 놀아줘야 될 것 같기도 해서 9시쯤 대충 옷을 차려 입고 개비네 집으로 갔다.
애들이 꽤 많이 모여 있었다. 다들 집에서 가지고 온 와인이며 위스키, 베일리스 등을 꺼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초라한 손으로 Buy 1 Get 1 free 오렌지 쥬스를 하나 쓱...^^ 오늘 밤을 불태울 친구들은 노라(헝가리), 개비(몰타), 카챠(독일), 빅토리아(독일+영국), 엠마뉴엘(프랑스)과 남자친구인 마틴(프랑스), 그리고 나 이렇게 일곱명.
반가움에 쪽쪽 볼인사를 하고 일단 와인을 짱짱 하면서 이야기꽃을 한창~ 엠마뉴엘은 논문 주제가 와인 투어리즘이라 제법 전문가처럼 와인에 대해서 설명한다. 꽤 흥미로운 주제다. 그래서 자기는 이것저것 많이 마셔봐야 된다면서 웃으니까 남자친구가 걱정반 사랑반 눈으로 바라본다. 엠마뉴엘은 프랑스 앤데 대학을 프랑스에서 2년 독일에서 2년 이렇게 좀 스페셜한 코스를 했다. 그래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다 잘한다. 16살 부턴가 매년 여름에 일을 했고 호주, 독일에서도 파트 타임으로 일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지금도 시내 옷가게에서 일주일에 10시간 정도 일을 하고 있다. 남친과는 대학 다닐 때 독일에서 만났다는데 키도 작살나게 크고 누가 프렌치 아니렐까봐 꽤 삼삼하게 생겼다. 현재 런던 근교의 컴회사에서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고 그런다. 둘이 한 3년 정도 같이 살았는데 여전히 다정해 보였다. 근데 중요한건 엠마뉴엘이 1978년 생이라는 거다. 허걱..나는 그 얼굴에서 풍기는 성숙함을 보았을 때 나보다 최소한 3-4살은 많을 거라고 생각했거덩. 근데..그저 어린애 같고 (실제로 어린이 트래블카드를 사도 아무도 의심안하는) 부모님 품에서 오냐오냐 하며 큰/크고 있는 내 동생 주희랑 동갑일 줄이야. 저 성숙함..믿겨 지지가 않는다. 내 나이를 말하니까 엠마뉴엘도 놀란다. 카챠는 독일앤데 프랑스에서 12년동안 살았고 여기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 프랑스어가 거의 모국어인 독일어 수준이라 엠마뉴엘과 아주 자연스럽게 불어로 대화를 한다. 빅토리아는 독일+영국 앤데, 자기 말에 의하면 항상 정체성(identity) 문제에 시달다고 한다. 독일에서 태어나고 영국, 카나다,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에서 살아서 각각 언어도 모국어처럼 구사하지만 누가 Where do you come from? 이라고 물을 때 젤 혼란스럽다고 한다. 우쒸, 난 부럽기만 하구먼..헐헐 ^^ 노라도 대학은 헝가리에서 나왔지만 고등학교를 영국에서 나오고 어릴 때 독일에서 어학 연수를 몇 년 했다.
유럽애들하고 대화를 하면 할수록 느끼는 거지만 걔들의 사회진출이나 외국 경험은 정말 빨리 시작되고 흔해서 너무나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우리 나라 학생들이 사실 대학 졸업 후 남자들은 군대 이후 진정한 사회 생활을 시작하는 반면 얘들은 참 어린 시절부터 많은 경험에 노출되고 독립성을 키워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도 지들 기호에 맞춰서 영어, 독어, 불어, 이탈리어를 넘나들며 대화를 하고 이 언어, 저 언어 자유자재로 끼어들며 대화를 한다.(멀뚱 멀뚱...) 영어 하나만도 힘들게 배우고 또 영어 하나만 잘해도 무지 대우받는 우리나라하고는 정말 다른 것 같다. 사실 이건 문화적인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지만. 그리고 이 애들의 영어에 대한 태도도 그저 외국어 정도의 수준이다. 그냥 필요에 의해 배웠고 말 하다가 막히면 옆 친구한테 독어하고 프랑스어는 알겠는데 영어로는 뭐지? 이렇게 물어가면서 대화를 이어간다. 게다가 워낙 혈통이 믹스된 애들이 많아서 엄만 하프 스페니쉬, 하프 저먼, 아빤 하프 오스트리안, 하프 인디안 등등 이런 케이스가 정말 흔한것 같다. 나? 아빠 100% 코리안, 엄마 100% 코리안, 할머니 할아버지 당근 100% 코리안. ^^ 나 같은 케이스가 차라리 이 애들 눈에는 더 신기해 보일지 모르겠다.
이탈리아어가 (그저) 너무 아름다워서 배우고 싶다는 카챠의 툭 던지는 말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같으면 그저 아름답다고 배우고 싶을까? 영어 하나 하는 것도 버거운데..쩝..그거 배울바에 차라리 소위 '경쟁력' 있는 언어에 투자를 하겠다...그리고 어느세월에 제 3외국어를..유럽언어가 과연 쓸모가 있나..' 등등 여러가지 계산을 하는 내 자신을 보면서 사고가 많이 다르구나 하는 것을 다시한번 느꼈다. 얘들은 나라들이 다들 다닥다닥 붙어 있으니까 정말 맘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슝 날아가서 놀거나 배우거나 다 할수가 있다. 각 나라 언어 연수도 보통 1개월에서 3개월 이렇게 짤막짤막, 그리고 직접 일을 하면서 배운다. 이 밖에는 아무런 장애가 없다. 보통 우리나라 학생들이 영어 잘하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주눅, 동경, 스트레스..심각하게는 부모에 대한 원망(!) 이런 것은 걔들한테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 듯 했다.
진지하게 얘길 적고 있지만 사실 아주 즐겁게 술마시고 다들 알딸딸하게 취했다. ^^ 밤 12시쯤 우리는 유니온으로 향했다. 개비가 플랏메이트인 두명의 남자애들까지 꼬셔서 우리는 죽 일렬로 힘차게 걸어갔다. 유니온 나이트는 그리스 애들로 북적북적..이 학교엔 유독 그리스애들이 넘쳐 흐른다. 통계에 의하면 700명이 넘는대지? 암튼 그리스팝에 맞추어서 우리는 또 한 번 밤을 불태웠다. 마케팅 숙제도 잊고, 리서치 프로포절도 잠시 잊자. 에라 모르겠다! 일단 무조건 춤추는 거다~~앗! 안토니오 반데라스 처럼 잘 생긴 개비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고 노라도 거기서 만난 친구들을 많이 소개시켜 주었다. 나도 벨리댄싱과 스페니쉬 클라스에서 어울리던 친구들을 만나서 쪽쪽 인사를 하고 애들한테 소개시켜 주었다. 꼭 나이가 같아야만 '친구'가 될 수 있는 우리나라 문화- 그래서 어쩔수 없이 친구의 범위가 한정될 수 밖에 없는-가 여기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이트에 갈 때 섹시하게 보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저 스트레스 풀 목적으로 가도 정말 괜찮은 곳이다.
그 밖에도 과장, 부장, 대리 같은 job title이 전혀 의미가 없고 그냥 그 사람의 first name을 부르고 나이에 상관없이 토론을 즐길 수 있는 문화, 결혼하기 전에 일단 서로에게 맞는 사람인가 동거를 당연시 하는 문화. 사소한거일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겪으면서 나의 25년간의 사고방식(mentality)은 정말 정말 많이 변해간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 스스로가 여과하여 판단을 해야되는 거겠지만 나중에 한국에 돌아갔을 때 과연 제대로 적응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오늘 좀 심각했나? 암튼 새벽 1시 30분이 넘어서 집에 돌아왔는데 노라와 카챠는 좀 더 있겠다고 했다. 많은 것을 느낀 하루다.
Jasmine
*자료제공: Life in London |
